<공모> HEAL더WORLD 힐링콘텐츠 창작공모

권민희
2019.04.16
제목 : 운디드 힐러

지난 3월 힐링콘텐츠 창작캠프 인터뷰작가 워크숍 '경청과 존중'에 참여했다.
그때 단 한편의 글을 적고 그간의 글들을 모아 에스프레소북에서 오는 6월 출간을 약속했다.

마흔, 자서전을 적어보기 딱 좋은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숨은 쉬고 있지만 부모님의 삶의 모양대로 살게 된다. 이십 대가 되어 방황하고 깨지며 자신을 찾고, 그 속에서 발견한 가치로 삼십 대를 살았다. 하지만 사십 대가 되어보니 환경도 많은 변화가 있고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긴다. 제2의 사춘기가 된 기분이랄까?

그럴 때 고요한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를 잘 보내면 오십 이후에 다른 패러다임을 만드는 비기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십 대는 사회적으로 커리어상 시니어의 나이이다. 그래서 조금 지루해지기도 하고 관성에 젖기도 한다. 인생은 계속 신장해 나아갈 때 의미가 있다. 마흔에 준비하는 비기너 수업. 그것이 '마흔 살의 자서전'을 쓰는 이유로 괜찮지 않을까?

이 책에는 마흔의 저자를 알 수 있는 다양한 형식의 글이 들어있다. 일기, 편지, 수필의 형식에 담긴 조금은 특별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을 통해 나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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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권민희
음악과 춤을 사랑한다. 20세기 말 은행, 대기업 등에서 사회로 첫발을 디뎠다. 2000
년부터 매거진, 출판 에디터로 일하면서 요가, 불교, 명상을 통해 마음을 공부했다.
2010년부터 마음 안녕을 위한 커뮤니티와 콘텐트를 만드는 연구와 실험을 시작,
2012년 소셜벤처 기업 <대추씨>를 창업하여 '덕업일치'를 실현했다. 온오프라인에서
강연과 콘텐트 기획을 하며 연구와 창작 활동을 한다. 2013년도부터 의식개발 프로
그램 Avatar Master로 개인의 변화를 돕고 있다. 현재 마음피트니스 대표이자 ®
(사) 기린청소년 감사이다.

2
프롤로그

마흔 살에 쓰는 자서전
2017년 추석, 집에서 혼자 지내며 열흘 간의 긴 연휴기간을 보냈다.
40대의 첫 추석,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이틀의 시간이 지나갔다.
남아있는 시간동안 재미삼아 블로그와 잡지 등 여기 저기 있는 흩어져 있던
글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문득 '40대에 자서전을 쓴다면 이런 내용들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읽어 보니 치열했던 내 삶의 순간들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삶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내용은 그때 발견한 글들이 1장의 중심이 되고,
2장에서는 최근 적은 에세이들을 모아보았다.
돌아보니 20대의 나는 은행과 대기업에 취직해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외부 환경에 시달리다 퇴사를 했다.
이후 좀더 자유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것을 고민하다가
잡지, 출판사 등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10여년간 생업으로 삼았다.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며,

3
프롤로그

나만의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간
덕분에 삶의 곳곳에는 음악과 춤이 있었으며
배낭여행, 요가, 수행, 명상으로 이어지는 내면 탐사의 여정을 만들어갔다.
2010년 서른을 넘기고서 그간의 이해를 바탕으로
‘테라피디렉터’라는 직업을 만들어 살아가기로 했다.
내면을 변화시키는 콘텐트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처음 2년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옳음과 정당함의 이유들 백여 가지를 만들었던 기간으로 여겨진다.
커다란 백지를 채워가는 미술초보자의 기분이었다.

4
프롤로그

일단 실행하고 무조건 했다. 단 한 번뿐인 삶이니까!
2012년 3년째 되던 해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창업’이었다.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을 통해 ‘대추씨’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사회적 변화를 만드는 콘텐츠를 만들겠노라는 호기로운 다짐으로 시작했고
축제, 교육, 워크숍, 사회공헌 프로젝트 등 다양한 형태로
기업, 기관, 학교, 단체, 개인 등 여러 대상과 만났다.
2014년부터는 공감놀이터, 마음피트니스 라는 이름의 콘텐트로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일을 해왔다.

5
프롤로그

인생수업,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
40대에 본격 접어든 지금,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이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가를 느껴본다.
내 삶 속에는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도 여러 차례 있었고,
슬럼프와 무기력의 연속적으로 찾아왔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겪고 있는 씁쓸한 현실에 대해서
어떤 변화를 가져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복과 치유, 그리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간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져 조각보 같은 삶의 모양이 되었다.
특히 창직과 창업의 8년간의 시간은 여러모로 배움의 시간이었다.
내가 이토록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까닭은 무엇인가 곰곰이 느껴보니
2000~2010년 사이에 만났던 여러 만남들을 삶에서 체화해보려는 움직임이었다.
실패했지만 기뻤던 면접장
직업들은 삶에서 나를 표현하는 옷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패션피플은 아니지만 직업을 통해 문화적 표현을 해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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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4대 보험 가입자로 출판사에서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2010년 봄,
아이보리색 정장을 입고 안국역 인근의
대기업 홍보팀 면접을 보러가던 날 오후를 기억한다.
명상을 오랜 시간 공부하면서도 연봉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고,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느끼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던 나.
면접장에서 “권민희씨는 주말에 무얼 하세요?”라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실제 삶이 많이 다르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2002년 겨울 이후 거의 모든 주말과 퇴근 후,
여가 시간은 요가와 명상과 수행, 봉사라는 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토록 ‘잘 쓰이는 삶’을 열망했지만 마음 깊은 곳의 열등감은
현실에서 다른 모습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저는 여행을 합니다.”라고 대답을 했고,
“누구랑 하나요?” 질문이 돌아왔다.
“혼자 갔어요. 저처럼 혼자인 여럿이 함께 했죠.
저는 주변 풍광을 보는 여행이 아니라 내면을 보는 여행을 합니다.

7
프롤로그

지난 주말에는 안동에서 열린 명상 워크숍에 다녀왔어요.”라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내게는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뭔가 방향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밝아짐을 느꼈다.
그리고 면접장 바깥으로 나오는데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 일을 해야겠구나. 이 길이구나.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사회생활과 나를 찾는 인생 공부가 통합되는 순간이었다.
회사로 돌아와 사장님께 퇴사를 이야기 했고,
그간 배웠던 것들을 사람들과 어떻게 공유할까 설레였다.

삶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던 시간
2010년 봄부터 이태원, 홍대, 충무로, 여의도 등에서
힐링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명상 수업을 열었고,
페이스북을 통해 매일 일상을 공유했다.
개인 레슨을 하기도 했고, 그간 배웠던 많은 것들을 어떻게 쏟아낼지 고민했다.
부끄럽게도 첫 번째 실패의 지점이다.
내가 배운 것 보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8
프롤로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얼까로 방향이 바뀐 때가
2012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하지만 중력의 방향처럼 나의 틀을 깨기가 어려웠다.
새터민, 학교밖 청소년,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족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다고 알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배워나갔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내가 하려는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고 사랑하는 일임에도
내 안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편견과 판단을 내려 놓고서야
잘 쓰일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일상'이라는 키워드
명상과 예술이 융합된 컨텐트를 활용하여
직장에서 성실히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쉼과 함께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도록
‘의미 있는 딴 짓’을 할 수 있는 워크숍을 만들어냈다.
바로 놀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명상을 경험하는 워크숍 ‘공감놀이터’이다.
재미있게도 깨달음의 면접을 보았던 대기업의 지원금을 받아
‘마음피트니스’라는 교육 콘텐트도 만들었다.
그리고 기업과 단체에서 지금까지 진행해오고 있다.

나는 행복한 사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루하루의 마음이 더해지고
작은 행동이 모이고 쌓이며 일어나는 일임을,
그 힘이 모여 어느 순간 큰 변화를 만드는 것임을 믿는다.
만남을 통해 변화를 시작하고,
마음 속의 무거운 것들을 비우고,
서로 연결되어 나누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하는
지금의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10
프롤로그

나는 이 책을 통해
남들이 걷지 않는 길을 만들어 걸었던 시간을 있게 한
삶의 순간들을 엮어보려고 한다.
내 삶의 가치들을 발견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권민희'로 살아가기 위해
길을 만들어왔던 여정들이 내게는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출생, 성장, 나이대 등의 열거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들여다보고
독자들과 함께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이 글들을 스물아홉 빛이 되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나의 오빠 권정민에게 바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벗들의 반짝이는 순간들과 연결되길 바란다.
삶에서 ‘왜’라는 질문이 찾아올 때
조금의 위안과 방향성을 함께 찾아나갈 친구가 여기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도록.


목차

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 13
미움이 몸 속에 갇히면 .................................................. 18
오빠 .......................................................................... 21
오체투지 .................................................................... 26
서른 셋 무대에 서다 ..................................................... 32
사랑하는 아버지께 ....................................................... 41
내 마음 안의 엄마의 방 ................................................. 48
내가 좋아하는 호칭 또는 애칭은? ................................... 55
젊은 날 ...................................................................... 58
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 76
할머니 ....................................................................... 78
위저드 ....................................................................... 83
대추씨의 유래 ............................................................. 87
크리스마스 ................................................................. 92
여행 .......................................................................... 96
엄마의 바다 .............................................................. 104
새아버지 .................................................................. 112
눈치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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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1989년 과천 도서관은 나에게 치유의 공간이자
새로운 상상과 희망을 그리게 해주는 캔버스 같았다.
<12살의 봄>이라는 책을 콩닥거리며 읽었던 기억.
어린이실에서 성인 열람실로 처음 들어갔던 순간,
정기 간행물실에서 최신의 잡지와 뉴스를 만났던 짜릿함.
서고, 아 그 드넓은 책의 바다.
내 키보다 훌쩍 컸던 책장의 높이, 그 속에서 느꼈던 아늑함.
사춘기에 접어들던 내게 자유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공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바로 어제 같다.

2019년 나는 충주의 꿈 너머 꿈 도서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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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30년의 시간들이 두 도서관 사이에 있다.
그 시간 동안 내 삶을 관통했던 키워드는 '사랑'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들며 이성에게 느꼈던 호기심부터
친구, 동료, 도반, 지구, 우주로 뻗어나가며 느꼈던 여러 감정과 헌신,
소중함에 대해 배워나가는 시간들.
2019년 3월 충주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개최 된
힐링콘텐츠창작 캠프에 참가해 자서전 쓰기에 열의를 만들었다.
이번 행사 오리엔테이션에서
윤나라 선생님은 감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주었다.
감사란 '당연히 여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이야기가
내 가슴에 들어와 움직였다. 이 순간이 새로워진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으로 내 삶을 바라보려 한다.
삶의 기억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사랑을 표현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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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마흔 살의 자서전 제목으로 오후 강의에서
고도원 선생님이 나눠준 '운디드 힐러'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가장 좋은 치유자는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한다.
자신의 상처를 잘 돌보고,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미소로 다가갈 수 있는 '운디드 힐러'.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이 순간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바라보려는 것이
이번 2박 3일간 내가 하고 싶은 태도이다.
이 책을 앞으로 다가올 삶에 선물하고 싶다.
나 스스로에게든 다른 이에게든 혹은 다가올 다른 삶에게든 말이다.
마흔, 자서전을 만들기 딱 좋은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는 부모님의 삶의 모양대로 살게 된다.
이십 대가 되어 방황하고 깨지며 자신을 찾고,
그 속에서 발견한 가치로 삼십 대를 살았다.
사십 대가 되어보니 환경도 많은 변화가 있고 가치관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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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제2의 사춘기가 된 기분이랄까?
마흔, 고요한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계속 신장해 나아갈 때 의미도 생기고 재미가 있다.
이 시기를 잘 보내면 오십 이후에
다른 패러다임을 만드는 비기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십 대는 사회적으로 커리어상 시니어의 나이이다.
그래서 조금 지루해지기도 하고 관성에 젖기도 한다.
시니어에서 준비하는 비기너 수업.
그것이 '마흔 살의 자서전'을 쓰는 이유로 괜찮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나를 찾기 위해 열의를 가지고 배웠던
대표적인 키워드들을 중심을 서술해 보려고 한다.
내면을 치유하고 그 에너지를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연둣빛이 도는 나목들, 아름다운 공간과 사랑이 담기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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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그리고 맑은 얼굴의 사람들...
이 속에서의 시간들이 훗날, 기억이 되겠지.

2019년 3월 15일 꿈 너머 꿈 도서관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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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미움이 몸 속에 갇히면
여러 이유로 엄마는 슬펐다.
내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울음을 삼키며 죽으려고
한강으로 나섰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어린 시절 이별 후
재회한 20대 초반부터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 역시 슬퍼졌다.
나는 뱃 속에서부터 슬픔이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엄마가 나를 뱃속에 품었을 때는
슬픔, 절망, 우울, 미움, 분노의 절정의 시기였다고 한다.
열 달간 이런 것들이 나의 뼈로 피로 세포로 스며들었고
내 몸에는 내가 의도적으로 가져오지 않은 감정과 정서들이 많았다.
부모님의 헤어짐으로 다섯살 무렵 시골 조부모님댁으로 보내진 후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이 마음에 쌓이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물어보면 안되는 게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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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그저 보고 느끼고 담아두는 게 일상이 되었다. 점점 말이 없어졌다.
중풍으로 움직임이 불편하셨던 할아버지에게 글자를 배웠다.
ㄱㄴ 선과 점이 문장이 되고 책이 되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지식이 되는 과정은 경이로움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뛰는 일이었다.
내 삶은 이때부터 가슴이 뛰는 방향으로 이동했던 것 같다.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시골에서 도시로 삶의 공간이 바뀌었다.
글자가 많은 도시가 좋았다.
안양 인덕원 사거리에 살았는데 국민학교는 과천으로 입학했다.
버스 통학을 시작했다. 오가는 길이 어린 나에게는 버거울 때가 많았다.
매일 버스에서 느끼는 순간들은 지루하지 않아 견딜 수 있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은 집이 아니라 도서관이었다.
국민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약 12년의 기간동안
나에게 가장 중요도가 높았던 공간이자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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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사람보다 공간에 대한 안정감이 컸다.
책 속에서 다양한 세상을 만났다.
한편 내 속에서는
슬픔, 절망, 우울, 미움, 분노 등의 감정들도 쑥쑥 자라났다.
마음의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얼굴은 까맣고 잘 웃지 않았다. 말도 없었다.
2차 성징이 일어나던 13~15세 무렵,
잘 웃고 명랑한 캐릭터로 과하게 성격 변신을 시도했다.
마음 먹은 탓인지 어쩐일인지 15~16살 사이에는
11센티미터 가량 키가 급격히 크고 내 외모는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미움은 몸 크기만큼 늘어난듯 예민하고 까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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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오빠
오빠와는 견원지간처럼 다퉜다.
오빠가 5학년때 '낮에 나온 달님'이라는 연극에서
달 역할을 맡았었는데 중요도 없는 역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늘 오빠를 이겨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싸우기만 했던 오빠가 2005년 봄에 몸을 떠나고
나를 계속 아프게 했던 것은
'오빠가 나를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는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내가 예민함에 오빠를 미워했지 오빠는 늘 내게 의지하고
마음 속 얘기를 해줬고,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오빠와 나는 해와 달 같은 오누이가 되어
조금은 다른 사랑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뼈와 살에 스며든 것들이 조금 변화했지만 많이 바뀌진 않았다.
미움이 몸 속에 갇히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느라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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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키가 자라는 것이 멎은 스무살 부터 나는 아팠다.
꽤 오랜 시간 슬픔과 미움을 저항하느라 즐거움을 찾아다녔다.
춤, 예술, 문화...그 속에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지만 나는 우울했다.
마음의 균형을 잡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인도 배낭 여행에서 돌아와
요가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반라의 터번을 쓴 할아버지가 상자 속에 들어가는 TV의 한 장면,
내가 아는 요가의 전부였다.
요가를 직접 만났던 것은 2002년 6월 인도 여행을 하면서였다.
바라나시 강가에서 매일 아침 같은 동작으로 요가를 하는
이스라엘 청년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마음의 씨앗 같은 것.
이듬해 사랑니를 뽑고 돌아오던 길에 마취에 덜 깨어 찾아간
한국요가연수원에서 차담을 하다가 덜컥 지도자로 입문한다.
2004년부터 1년여 본원에서 요가 강사로 데뷔를 했다.
돌아보면 나는 배움에 있어 운이 억세게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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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알다시피 요가는 몸의 균형을 만들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데 무척 효과적인 수행법이다.
당시 요가 스승님이었던 이태영원장님은
원전에 기원한 하타요가를 중심으로
명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셨는데
요가와 명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수행'의 길이 열렸다.
2003년 말 '깨달음의 장'이라는 수련 프로그램을 통해
법륜스님을 만나고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출발하여 2013년 가을까지 매일 아침
108배와 명상 등 천일결사 기도 수행을 하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만들고 움직였다.
이처럼 내가 삶에서 만든 공부 방법은 마음의 소리를 듣고
몸으로 실천하고 체득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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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지적 이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심리와 관련된 공부들도 했는데,
그중 2011년 초 서울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진행된
<내면의 헬스코치>라는 보완의학 시리즈 강연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중장년층이었고 나는 무척 젊은 편이었다.
그중 정신과전문의 김영우 선생님의 강연에서
우울은 어떤 영적 각성의 신호라는 이야기에 귀가 기울여졌다.
여러 해 명상을 하면서도 막상 그 증상과 감정을 마딱뜨리면
자신이 없어지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강의에서 정신과 질환이라는 것이 인간의 진화와는
별도로 분류된 한정적인 체계라는 내용이 기억난다.
내 마음의 증상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오빠 생각이 나면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오빠 있잖아 내가 그간 이런 것들 공부했거든~ 삶에서 우울, 절망, 미움이 일어날 때
바깥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이 일어나지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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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자신을 이해하고 감정들을 관리하는 방법과
내적 힘을 키우기 위해 정성과 관심을 쏟는 방향이 훨씬 지속가능한 거 였어. 그것을 공유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일을 하는 이유야."
아직 부족함도 많지만 더 많이 연구하고 시도하고 나아가기를
오늘도 글을 적으며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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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오체투지
오체투지
‘생명과 평화의 길’을 추구하며 지난 3월 순례길에 오른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단’이 16일 서울에 입성하여
17일 아침, 사당동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오체투지 순례는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의 신체 다섯 부위를
차례로 땅에 대고 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순례 방식이다.
참가자들은 경찰의 통제 속에 1개 차로에서
5~6보 전진한 뒤 절을 반복했고
‘10분 전진, 3분 휴식’의 원칙 속에 순례를 진행했다.
이날 서울정토회에서 12명의 인원이 함께했다.
일요일 새벽 5시,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어났을 무렵에도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절을 하는 내내 '괜히 추운데 움직이면 감기 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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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좀 더 쉬고 싶다.' 등등 여러 생각이 일어났다.
결국 6시쯤 기도를 마치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8시, 겁나고 두려운 감정을 지켜보면서
‘그래 일단 해보는 거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일부러 버릴만한 옷과 신발을 입고 나섰다.
오체투지를 하면서 모든 걱정과 두려움의 99%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땅 위에서 보낸 3시간은 그 어떤 일요일보다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해주 었다.
비가 지나간 아스팔트는 생각보다 깨끗하고 편안했다.
촉촉한 대지의 기운은 온몸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일전에 한 스님의 ‘자벌레처럼 기어 왔다’는 표현을 보았는데,
나의 표현 한도에서는 마치 지렁이가 된 기분이었다.
몸을 낮추자 무심했던 자동차 경적소리도 커다랗게 들려 움찔했다.
내가 지구에선 아주 작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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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자연스레 작은 생명들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걷는 동안, 침묵하는 시간은 온전히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생각들,
오랫동안 묵은 화, 불안함 여러 감정들을 땅위에 내려놓아졌다.
마음도 몸도 점점 가벼워졌다.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거리를 3시간에 걸쳐 온 몸으로 걸어보는 것은
성격 급하고 생각 많은 나에게 여유로움을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월요일, 바쁜 하루가 평화롭게 지나갔다.
도반들과 함께한 오체투지 순례의 시간은 큰 선물로 기억될 것 같다.
모닝콜을 다시 시작하며
요즘 저녁법회국 서원행자 포살법회 업무를 맡아 진행하는데,
잘 하고 싶은가 보다.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다. 백 일을 해보니 알게 되는 사실이다.
'이제 그만 할까?' 이런 생각이 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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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얼마 전부터 청년 친구들과 다시 모닝콜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하자는 말에 가볍게 yes라고 해놓고,
조금씩 '할까 말까' 이런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을 본다.
하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이 습관은 쉽게 벗어나 지지 않는다.
그래서 스승님께서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그냥 해본다'라고 말씀하셨나 보다.
직장생활도 그렇다. 직장생활이 주는 장점들을 느끼면서도
자꾸만 '그만둘까' 이런다.
연애도 그랬다. 만나면 좋은 점들을 알지만
마음은 계속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간 본다.
자주 현재에 있지 못하고 내 속에 갇혀지내며 외롭다고 느낀다.
일요일, 오체투지를 하면서도 그랬다.
저녁법회국 소속으로 참가했으면서 청년 쪽으로 마음이 더 간다.
청년 소속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는 저녁법회국 사람들 눈치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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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저녁법회국 사람들과 어울려 일정을 마무리할 땐 마음이 엄청 아쉬워했 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렇게 쓰면
'날 어떻게 볼까' '쓸까 말까' 끊임없이 마음이 시끄럽다.
왜 이 글을 쓰는 걸까?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 S의 글 읽고 마음이 동했던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내 마음을 내어 놓아보고 싶었다고 할까?
글을 쓰면서 '거의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같군' 이런 생각도 든다.
어릴 적에 어버이날에는 엄마한테 고마워해야 할지
아빠한테 고마워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아빠 앞에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조심스러웠고,
엄마한테는 아빠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하면 죄인 같았다.
눈치 보는 습관은 그분들이 만들어주신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터득한 '사는 법'이었던 거다.
영화 <똥파리> 주인공의 폭력을 그러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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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그 습관처럼 살다 보니 어렵고 힘들어서, 사는 법을 바꾸고 있는 중이 다.
나에겐 아침 수행이 그랬다. 108배를 하고, 명상을 하고 경전을 읽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새롭게 익히고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때 묻지 않는 연꽃같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늘 아침 경전은 참 익숙한 문구였다.
아름답고 따뜻하면서도 단단한 느낌.
내어 놓고 나니 마음 속이 좀 조용하다^^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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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서른 셋 무대에 서다
공연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는 25일 오후 5시 광주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빛고을 진리를 찾는 사람들' 주최로
<변형의 춤, 구르지예프 무브먼트> 공연이 열린다.
나는 공연자로 이 무대에 설 예정이다.
나는 지난 2008년부터 매달 한번씩 광주에 내려가
'빛고을 진리를 찾는 사람들' 모임에서 주최하는
구르지예프 무브먼트 집중과정 워크숍에 참가했다.
3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는 집중을 마칠 때마다 간단한 시연회를 했지만
이번처럼 큰 공연장에서 대중을 상대로 이뤄지는 공연은 처음이다.
서른셋, 일반인인 내게 이런 큰 무대를 경험한다는 것은 꽤 큰 도전이 다.
한번도 무대에 서본 경험이 없는 내게
이번 공연이 어떤 경험을 안겨 줄지 자못 기대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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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아침 명상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을 만났지만
설렘으로 변환하고 내게 용기를 주었다.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특별한 명상법
1800년대에 출생한 아르메니아 출신
영적 지도자 구르지예프에 의해 계발된 '구르지예프 무브먼트'
대표적인 동적 명상 수행법이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는 법을 가르친다."
'신성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구르지예프 무브먼트는
몸을 통해 내적 변형을 일으키는 놀랍고 강력한 명상법이다.
이 명상법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명상을 할 수 있는 사람,
즉 일정 시간 이상 명상을 통해 모인 내적 각성을
좀 더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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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특별하고 독특한 춤이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익혀야만 할 오블리가토리(Obligatory),
강인함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더비쉬(Dervish)춤,
복잡하고 상징적인 동작들로 이루어진 기도(Prayer)춤,
'신은 자비로움을 가졌으니' 등의
구어적 요소를 담고 있는 춤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모든 무브먼트는 각각의 춤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과 함께 이루어진다.
음악은 작곡가이자 연주자인 토마스 드 하트만에 의해 악보화되었다.
다양한 무브먼트를 하기 위해서는 순간에 전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머리와 팔, 손과 발이 서로 다른 박자로 움직이기 때문에
특정한 단계의 각성이 없이는 춤을 제대로 출 수가 없다.
구르지예프는 세 가지 센터 즉, 지성, 감정, 동작 센터와 더불어
깨어 있는 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춤을 통해 습관들을 지켜보고 뛰어넘게 되며, 조화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 깊은 명상 상태를 경험하여 내적인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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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지예프 무브먼트의 국내 첫 소개 무대
온라인 카페 '빛고을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명상 커뮤니티로,
온라인으로 자신의 명상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내적 성장을 위한 오프라인 워크숍을 개최하기도 한다.
교사, 의사, 주부, 직장인, 번역가, 학생 등 다양한 직업과
20~5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
서울, 부산, 대구, 전주, 광주 등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다.
이번 공연은 이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지난 3년여간
함께 활동해온 20여 명의 사람들이 한달에 한 차례 이상 함께 모여
구르지예프 무브먼트를 추어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인도 오쇼공동체에서 생활을 한
명상지도자인 독일인 달마와 한국인 풀라를 통해
지난 2005년 국내에 소개된 구르지예프 무브먼트는
다양한 장소에서 워크숍과 클래스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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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광주에서만큼 지속적으로 모임이 결성된 곳이 드물다.
예향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예술적인 특성이 묻어나는 명상법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풀이해본다.
지도자인 달마는
"이 공연은 내적인 고요함을 관객들과 나누는 자리"라고 했다.
춤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시연회는 추는 사람은 물론
지켜보는 사람들의 내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시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박수를 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침묵 속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면 된다.
추는 이는 물론이고 관람객 역시 깊은 명상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 다.
특히 이번 시연회는 구르지예프 무브먼트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소개되는 무대로 의미가 남다르다.
내적 성장을 위한 여정에 나서다
나는 지난 2008년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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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가족세우기>라는 책을 편집하며
독일인 달마님과 풀라님(한국인) 커플과 인연이 되었고,
꾸준히 가족세우기 세라피 워크숍에 참여했다.
의존성을 한 꺼풀 걷어내고 나를 살피는 작업을 깊이 있게 시작했다.
그리고 구르지예프 무브먼트가 내게 왔다.
무브먼트를 추면 강렬하게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판단과 분별, 생각들이 쏟아지기도 한다. 몸이 아파지기도 한다.
춤을 추다보면 그것에 끌려가지 않고 지켜 볼 수 있게 된다.
단지 그것은 일어나는 현상일 뿐 내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영적 성장이란 초능력을 발휘거나 단숨에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데서 출발하는 것 같다.
작고 여린 내면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고 생활을 바꾸기 시작했다.
내 능력을 인정받고자 애쓰고, 쉽게 상처받던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는 쪽으로 생각의 틀을 바꾸었다.
그리고 못하면 못하겠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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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부모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결혼을 하기 위해, 남들이 시선을 의식해 서 등
직장생활의 명분에서도 하나 둘 자유로워졌다.
자연스럽게 회사 생활이 정리가 되었다.
나는 요즘 글을 쓰고, 춤을 추고, 명상을 한다.
힐링 마사지와 아프리칸 타악기 젬베를 배우기도 한다.
내가 배운 것을 사람들과 나누고 정기적으로 자원 봉사를 한다.
약간의 파트타임 일을 통해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도 한다.
백수가 되니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머물 집과 단순하고 멋진 세간 살림이 있다.
무엇보다 나는 건강한 육체와 아름다운 표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 다.
이런 나를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부모님은 자유롭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들이다.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고 유머러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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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적 힘이 강하고 의지가 뚜렷한 분이다.
무엇보다 두 분은 자유 의지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계신다.
부모님의 건강은 내게 큰 축복이다.
그간 직장생활과 일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만들 수도 있고,
구체화해서 추진할 의지와 힘을 주었다.
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었다.
무엇보다 사회에서 만난 인연임에도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구르지예프 무브먼트는 내안의 사랑을 조화롭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 다.
의존성을 뛰어넘을 때,
아니 의존함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자유로워짐을 이젠 안다.
깊은 깨어있음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 광주로 내려간다.
하나의 일상일수도 있고 내 삶을 깨우는 새로운 사건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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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은 나의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서 전적으로 임할 것이다.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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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사랑하는 아버지께
겨울 햇살은 오아시스 같다는 표현이 떠오르는 오후입니다.
아버지, 안녕하세요?막내딸 꼼지예요.
어제도 전화로 아버지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렇게 또 편지를 쓰려니 막상 할 말이 없다 싶기도 해요.
아침 기도를 하면서
오늘은 아버지께 편지를 쓸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사실 몇 차례 마음이 일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이번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거죠.
아버지가 보내주신 농산물을 먹어서일 거예요.
요즘 저는 참 좋은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봄날, 아니 수확의 계절 가을 같다는 느낌 속에 있어요.
물질이 주는 위안이 아니라 마음이 풍요로운 그런 느낌,
아버지도 농산물을 수확하시면서 그런 느낌 속에 있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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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함께 할 수 있어 기뻐요.
지난 5월 둥근 마 파종 직전에 일어난
아버지의 교통사고를 통해 저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 순간들 속에서도 기도를 놓치지 않고 지내보니
장기 입원과 수술은 오히려 온 가족이 마음을 모으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계기로 돌아봐져요.
지난 시간 동안 꾸준히 기도를 해온 스스로가 고맙더라고요.
그때 만났던 감정들을 살펴보면
우선 과거에 쌓여 있던 미움과 원망, 혼란스러움이었어요.
아버지는 무기력하고 의지가 약한 존재라는 무의식이 건드려졌어요.
오랜 시간동안 자주 술에 취해 자신을 해치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 저에게는 삶보다는 죽음을 향해 몸을 돌리고 계신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어린 저의 가슴에 허전함으로 남아 있었어요.
저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참 많은 것을 찾아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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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덕분에 이렇게 삶의 경험이 풍성해지고 수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아버지는 제 삶의 큰 스승이십니다.
택배로 도착한 못생긴 뿌리 식물이
여전히 남아 있던 그 허전함을 툭 건드리며,
'이제 괜찮아.'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그간 여러 과정을 통해 머리로 알았던 부분이
가슴으로 찾아오는 순간이었죠.
그리고 다시 아침 기도를 하며 더 많이 더 깊이 가슴을 열어
제 안에 잠든 생명력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 병원에서 엄마를 독려하며
마 농사를 시작하시는 모습이
처음에는 너무 걱정스럽고 잘 될까 하는 의심이 일어났어요.
아마 제 마음의 습관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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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그리고 엄청난 의지로 치료와 치유를 해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아버지에게서 난생 처음 생명에너지를 느꼈더랬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농사를 마무리지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셨다는 것이 저에게는 남다른 감동이었어요.
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 전체로 찾아오는 순간,
흘렸던 눈물은 참 맑고 가벼웠어요.
아버지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도록
둥근마가 제게 왔나 봅니다.
수행하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장과 치유를 위해 찾아오는 것이라는 앎이 깊어집니다.
이 둥근 마라는 식물이 참 놀라워요.
겉모양은 진정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사랑은커녕 손댈 엄두가 안 나고, 혐오감마저 느껴집니다.
건드리기 쉽지 않아 며칠 방치했더니만 하얀 곰팡이가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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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농약이나 방부제를 만나지 않은 증거일지도...).
어젯밤 마음을 굳게 먹고 녀석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아껴주는 감정인가 봅니다.
5kg 한 상자, 여자 혼자 사는 살림에 살짝 버거운 모양새와 양입니다.
하지만 씩씩하게 감자 깎는 칼과 과도를 이용해 깎고 썰었습니다.
둥근 마 5kg을 갂아 깍둑썰기 하여 나누어 담아
냉동실에 넣고 정리하니 1시간 정도 걸리더라고요.
제가 손이 좀 느리거든요. 마를 손질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그 1시간 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요.
귀가 좀 간지럽지 않으셨나요?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게 새명을 주시고 이렇게 일용할 양식까지 주셔서...'로 시작했지만
또 '그때 그래서 섭섭했고 미웠고 화났다'며
툴툴거리는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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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그런데 그것을 마치고 나니 아버지가 참 애쓰셨다,
수확해 보내주셔서 고맙다는 느낌이 더 진해졌습니다.
올 한 해 잘 사셨어요. 저도 아버지만큼 잘 살았답니다.
오는 12월이면 천일결사 회향식이에요.
어느덧 7년재, 여전히 쉽게 상처받고,
불안한 마음에도 자주 빠지지만
그런 내 모습을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은
꾸준히 기도를 할 수 있었던 덕분이에요.
살아오면서 어떤 성과보다도 수행을 꾸준히 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삶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어요.
기도할 수 있도록 건강한 몸과 마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문득 5차 천일결사 첫 입재식 때
문경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그러고 보니 벌써 5년도 더 지난 일이 되었네요.
갑작스레 오빠가 세상을 떠났던 그때,

아버지에게 미움과 화만 일어나던 순간들.
저보다 더 많이 가슴 아팠을 아버지의 마음을 보지 못했구나.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고서야 알아졌어요.
사고로 얼굴 형상이 변해버리고 나서야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죠.
그때 아버지 눈을 바라보고 함께 눈물 흘리지 못해 죄송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살아 계셔서 참 감사해요.
편지를 쓰다 보니, 여러 감정이 찾아오네요.
이제 정리하고 일해야 할 시간이에요.
잘 지켜보면서 감사하고 기쁘게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사랑해요.

2010년 11월 25일 햇살 좋은 오후에
딸 민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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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내 마음 안의 엄마의 방
사랑하는 엄마, 명자 씨.
서울은 벌써 라일락이 피기 시작했어요. 올해는 봄을 만나는 게 참 더디 게 느껴졌는데 그래도 시간이 흐르고 있네요. 월요일은 유난히 하루가 길어요. 늦은 밤 편지를 쓰려고 자판기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눈을 감 고 몸을 느껴보았어요. 눈꺼풀이 살짝 떨리고 숨이 크게 내쉬어지네요. 오늘 하루 애쓴 나에게 감사해요.
명자 씨도 오늘 하루 숨 쉬느라 애쎴지요? 그 마음을 느껴보려고 해도 잘 느껴지지가 않아요. 지금 어떤 느낌일지, 명자 씨의 의식은 어디쯤 에 있나요? 지난주에 전주로 익산으로 응급실 여행 다니느라 피곤했을 텐데 곤히 잠들어 있으려나요? 그렇게 조용조용 지내는 당신, 지난 화요일 전주 대학병원의 혼잡한 응 급실 입구에 들어섰을 때 단박에 어디 있는지 찾아지더라고요. 그곳에 서 제일 예뻤거든요. 여전히 고운 명자 씨의 얼굴, 2년이 다 되어가네 요. 그렇게 누워만 있은지. 걸레도 행주처럼 빨아 쓰던 부지런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누워 있을 수가 있데요? 가끔 명자 씨는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시골 내려가서 도 곱게 화장하고 집안 안팎을 청소하던 당신, 그 부지런한 손을 한참 잡고 있었어요. 따뜻하고 폭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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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왜 따뜻하고 폭신한 느낌을 떠올리는데 눈물이 날까요? 그래요, 명자 씨 손은 별로 폭신하지 않았거든요. 바지런해서 좀체 붓는 일이 없었으 니까요. 명자 씨만큼 바지런하지 못한 나는 늘 잔소리를 듣곤 했죠. 이 제 그 잔소리조차도 그리워요. 그날 병원을 나와 서울 가는 버스에서 이 제 명자 씨랑 이별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조금 담담해진 거 섭섭 해 말아요. 신작로가 생기기 전, 정읍 할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자갈길에 모래 바 람 날리는 길이었죠. 큰 자갈이라도 만날라치면 쿵쿵 몸이 함께 튀어 오 르던 네 살 무렵의 버스 여행길이 떠오르네요. 부모님이 헤어지면서 할 머니 집으로 보내진 어린 남매, 정민이 오빠와 나를 처음 본 게 언제였 는지 기억나나요? 나는 명자 씨를 언제 어떻게 처음 봤는지 기억이 없어요. 아마 내가 다 섯 살 무렵이었을 테죠? 그때 명자 씨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와 우리를 만나러 왔었죠. 할머니께서는 새로 엄마가 온다고 했 어요. "새로? 엄마?" 엄마라는 말을 한 시간이 꽤 흐르고 만났던 새로운 엄마, 나는 명자 씨가 마음에 들었어요. 시원한 콧날과 쌍꺼풀진 큰 눈, 하얀 피부까지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 같았어요. 버스만 타면 멀미를 해 서 잠들곤 했는데 그런 나를 폭 안아주던 젖가슴이 참 푸근했어요. 그러고 보니 겨울이었던 것 같아요. 시골에서 먼지 공주처럼 지내던 나 만 먼저 데리고 도회지 안양으로 이사와 예쁜 옷을 사 입혀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시계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새엄마, 명자 씨는 어린 시절 내게 여신이었어요. 공주님이 된 것만 같던 몇 달이 지나 정읍 할머니 집에 남아 있던 정민이 오빠도 올라와 네 식구가 안양에서 처음 함께 살 기 시작하면서 내 질투가 시작된 것 같아요. 아들인 오빠를 더 예뻐한다 고 늘 샘을 부렸죠. 돌아보면 오빠랑 명자 씨는 찰떡궁합이었어요. 서 로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요.

내가 국민학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술을 과하게 먹고, 명자 씨를 때리고 큰소리를 지르는 날 은 참 힘들었어요. 그런 날이 반복되면서 명자 씨는 바깥으로 나가 동 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죠. 학교에서 돌아오면 명자 씨는 늘 보이 지 않았어요.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서 어둑해질 때까지 동네를 몇 바퀴고 도는 날이 많아지면서 내 가슴에 허전함이 쌓이고, 그럴수록 명자 씨가 미워졌어요. 한데 그렇게 아버지랑 푸닥거리가 있고 나면 명자 씨가 입버릇처럼 내 뱉던 "난 떠나겠다"는 말이 무서워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했네요. 난 엄 마가 필요했거든요. 외롭고 혼란스러운 날들이었죠. 사춘기가 되면서 명자 씨를 무시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마음 깊이 사 과할게요. 당신이 글씨도 잘 못 쓰고, 공부하는 내용도 잘 알지 못한다 고 마음으로 비아냥댔던 거 미안해요. 철없이 헛똑똑이 노릇했던 막내 딸내미는 부부 사이가 뭔지도 몰랐죠. 푸닥거리하면서 왜 같이 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이해는커녕 당신의 삶을 늘 무시하기 일쑤였어요.
참고서 산다고 거짓말하고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간 적도 있 어요. 늘 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명자 씨가 싫었어요. 입버릇처럼 말하던 "네 엄마 똑 닮아서 못생기고 고집통머리가 세다"라고 하는 말은 얼 마나 섭섭했는지 몰라요.

그렇게도 미워하고, 무시하고, 섭섭한 줄만 알았는데 20년을 넘게 함께 살며 명자 씨 음식 맛에 길들여진 나는 스무 살 넘어 친엄마를 만나 정 을 섞을 수가 없었어요. 입맛이며 살림살이며 너무나 다른 두 엄마를 만 나는 게 어찌나 혼돈스럽고 어렵던지, 20대의 내 방황은 거기서 비롯되었죠.
결핍, 사랑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두 엄마에게서 나는 그저 사 랑을 받고 싶었어요. 명자 씨의 가슴속이 늘 춥고 가난했고, 사랑을 받 아본 적이 없었구나 하고 알게 된 건 시간이 오래 흐른 후였어요. 그리 고 당신이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는 것도 당신이 병원 에 누워 있게 되면서 비로소 깨달았죠. 미움도 원망도 사랑의 다른 이름 임을 알게 해 준 명자 씨, 고마워요.

8년 전 정민이 오빠가 갑작스레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제 어린 시 절과는 거꾸로 명자 씨 내외가 정읍으로 귀향을 했죠. 그리고 어느 날, 전셋집을 얻어 혼자 사는 딸네 집에 왔다가 며칠 편히 쉬다 가려는데 우 연히 마주친 주인집 아저씨가 명자 씨보고 누구냐고 물어 "민희 엄마예 요."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엄마 얼굴이 아니라고 해서 당황했던 날 기억 하나요? 친엄마랑 연락하는 거 이야기해 주지 그랬냐고 크게 섭섭해했던 당신. 그때는 친엄마랑 명자 씨 사이에서 여전히 혼돈스러워 그랬어요. 그래 도 그렇게 말해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때 처음으로 명자 씨도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죠. 자식이 셋이 있다고, 남편이 바람나서 같 이 못 살고 나왔다고. 그 삶이 서글퍼서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혼자 방에 앉아 한참 울었어요. 처음으로 당신을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죠.

이태 전 여름, 큰 외삼촌 49제에 참석하러 올라온 길에 나를 보고 가겠 다고 전화로 들려준 목소리가 명자 씨의 마지막 목소리였어요. 다음날 외숙모에게 걸려온 전화. "엄마가 죽을지 모른다. 의식을 잃고 뇌출혈 로 쓰러졌다." 명자 씨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는 동의서가 필요 하다고 했어요. 서울에서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덜덜 떨리는 손으 로 동의서에 사인을 할 때까지도 몰랐어요. 명자 씨와 꼭 닮은 남자가 곁에 있다는 것을. 명자 씨의 막내아들이라고 하더군요. 정말 잘생긴 오 빠가 눈앞에 있더라고요. 이렇게 잘생긴 자식들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해요?

정민이 오빠가 스물아홉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명자 씨가 너무나 슬퍼해서 늘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오빠 기일이 었네요. 찾아 챙기지 않으면 이렇게 잊어버리기 일쑤예요. 명자 씨는 늘 기억했는데 말이죠. 내 것밖에 모르고 남 챙길 줄 모르는 막내딸 '꼼 지'는 오늘도 깜박했네요. 오빠 생일은 애쓰지 않아도 기억이 나는데, 8 년이 지나도 기일은 제대로 못 챙기겠어요. 그런 내가 명자 씨 가고 나 면 명자 씨 기일이나 잘 챙길지 모르겠네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 줄 거죠? 명자 씨는 먹을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편지를 쓰다 보니 정 민이 오빠도 생각할 수 있었네요. 고마워요 명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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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 씨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고 곁에서 간병하는 아버지를 보니 두 사람이 얼마나 애틋하게 살아왔는지 새삼 알게 되었어요. 한동안 명자 씨 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 눈물이 났는데 얼마 전 꿈에 명자 씨의 목소 리가 기억나지 않아 눈물이 났는데 얼마 전 꿈에 명자 씨 목소리를 들었 어요.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는 소리, 아직도 생생해요. 노래를 잘하 는 여자와 춤을 덩실덩실 추는 남자, 두 사람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어 요. 병원 생활 고달프겠지만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지내는 모습이 내겐 좋아 보여요. 일흔의 나이지만 여전히 순수하고 유머를 간직한 아버지, 아버지는 참 멋있는 사람이에요. 서로의 상처를 지켜보고 안아주고 30 년을 함께 한 두 분 모습이 이제야 보이네요. 나도 그런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요. 명자 씨도 그러길 바라죠? 입버릇처럼 손주 안아보고 싶다고 하던 소원 들어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벌써 새벽이 깊었어요. 종일 몸이 굳고 힘들었는데, 실컷 울고 나니 개 운하네요. 학창 시절 벼락치기 공부하느라 늦게까지 안 자면 불 끄고 자 라던 명자 씨의 음성이 떠오르네요. 명자 씨는 제게 늘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괜스레 굳어 있으면 풀어주는. 당신이 있어 잘 클 수 있었어 요.
그리고 지난해 사업을 시작해 그토록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신 덕분이에요. 명자 씨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제가 삶을 기쁘고 행복하 게 사는 일뿐었거든요. 당장이라도 의식이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줄 것 만 같아 희망을 놓지 못했던 시간들, 하지만 세상에는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병실에서 간병했던 아버지도 그런 순리를 배우는 시 간이었겠죠? 두 분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지금 이 시간이 주어져 다행이에요.

참 어렵게 느껴지던 편지였어요. 이 편지를 쓰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 아서 눈을 부릅뜨느라 한참이 걸렸어요. 이제 마치려고 해요. 부디 마 음 편히 놓고 푹 쉬세요. 여행하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이제 명자 씨가 아주 먼 여행 해도 '가지 마라'라고 붙잡지 않을게요. 명자 씨를 통해 강인한 생명 에너지를 만나요. 그리고 한 순간도 삶을 허투루 살 수 없구나 정신이 들어요. 긴 병원 생활 힘들 텐데 잘 견디는 명자 씨가 존경스러워요. 마음 여린 가족들, 마음 준비시키느라 애쓰나 싶기도 하고요. 시간이 이만큼 지나야 간신히 준비가 되니까요. 고마워요. 이렇게 이름을 부르니까 어때요 엄마? 저는 왠지 친숙하고 좋은데요. 편 지를 써 내려가면서 내 마음 안에 있는 엄마의 방을 구석구석 만나본 것 같아요. 여전히 정갈한 방 안, 나도 그렇게 하루하루 한 생 한 생 정 성껏 살게요. 지금 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엄마의 마음 잊지 않을 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2013년 7월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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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내가 좋아하는 호칭 또는 애칭은?
엄마는 나에게 오로지 민희야라고만 부른다.
별칭을 부르지 않는 게 좀 서먹했다.
이름. 이르다의 명사형인가.
나라는 개체는 나 이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 존재를 일러 이름이라 부르는 게 아닐까?
태명은 없었다. 태어나니 성별은 여자.
오빠와 돌림자 화할 민자에,
당시 대통령의 이름 중 한 자 빛날 희자를 가져와 지었다고 한다.
큰 인물이 되라는 아빠의 바람을 담아 민희라고 이른다.
나의 첫 별명은 키워주신 엄마가 지어줬다.
깜장콩.
까맣고 작고 말랐던 나는 중학교 3학년부터 키가 훌쩍 컸다.
그때부턴 먹성이 좋아 ‘꼼지’라고 불렸다.
엄마의 별칭들이 내겐 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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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중학교 과학선생님께서 개봉영화 주인공이라고 했는데
‘부시맨’이었다.
사춘기소녀의 감성파괴 호칭.
이후 양갈래 머리를 땋아 ‘인디언 추장 딸’이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명불허전 누구에게나 ‘권반장’.
20대 들어서 사내 인트라넷 아이디로 만들었던 cindy는
당시 유명하던 모델 신디 크로포드에서 연상되었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이후 댄스 동호회의 ‘신디cindy’,
법륜스님께 금강경 법문을 100일간 듣고 받은 법명은 ‘정묘향’,
독일 명상스승님께 받은 산야스명은 ‘네티네티’ ....
내 존재에 붙은 호칭도 다양하다.
그 이름을 쓸 때 연애하던 남자들은 그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직업이었던 은행원, 회사원, 기자, 편집자, 대표, 강사 등의
직함들이 나인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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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다보니 가장 애착이 가는 호칭은 연하의 그가 부르던 ‘민희’.
스스럼없이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민희 라고 부르던 그 대범함이 좋았 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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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2006년의 '그'가 적어 보내준 것.
12년 후의 '그녀'가 책갈피에서 꺼내 본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때는 옳았던 것들이 지금은 옳지 않음을.
그때는 맞았던 것들이 지금은 틀렸음을.
그때는 몰랐던 것들을 지금은 알게 된 것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녀
자신에게 너무나 철저하며
타인에게 너무 친절하다.
비밀이 많으며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아는 것이 많으며 경험한 것이 많다.
자기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알지만 통제가 안될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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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쉽게 감동받고 빨리 잊어버린다.
너무나 글을 잘 쓰며
부지런하며
게으를 때도 많다.
트집을 잘 잡는데 일리가 있다.
속도 있는 대답을 원한다.
말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
술과 담배를 즐기는 남자를 싫어한다.
사람을 쉽게 좋아하고 금방 싫증 낸다.
배고플 때 분노한다.
가끔씩 사 먹는 음료수는 포도주스가 대부분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돈 줘도 안 본다.
자기 몸은 자기가 잘 챙기니 오버해서 신경 써주면 곤란하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면 건강관리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신념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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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기기만 한 남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힘들어할 때는 내버려둬야 죽음을 면한다.
그러다 오라고 하면 잽싸게 튀어가면 된다.
만약 담배를 피웠다면 양치를 두 번 해도 소용없다.
미역국엔 절대 마늘을 넣어서 끓여주면 곤란하다.
대접에 묻은 간장도 수돗물에 씻으면 혼난다. 밥으로 닦아 먹어야 한다.
같이 밥 먹을 때 잔소리해도 잘 들어줘야 한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안경은 솔직히 잘 안 어울린다.
금방 잘 배운다
기타 코드도 쉽게 잘 잡는다.
그러나 피아노는 영 아니다.
늘씬하다.
그리고 섹시하다.
진심으로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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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식사할 때 잔소리가 많기 때문에 소화제는 항상 들고 다녀야 한다.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할 것이지만 계속 연구하고 싶다.
꽃은 다발로 주면 싫어한다.
하지만 알면서 줘도 무방하다.
옷을 잘 입을 줄 알면서 옷에 신경 안 쓴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한다.
여행을 좋아한다.
안경 고르는 센스가 탁월하다.
비싼 선글라스를 샀다.
몸이 유연하고 물구나무서기를 잘한다.
평생 풀지 못할 숙제가 있다.
그녀를 아는 남자는 그녀를 쉽게 잊지 못한다.
"왈, 왈" 강아지 소리를 귀엽게 낸다.
우주의 명령을 어기며 산다. 즉 화장을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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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대신 외출 시 선크림을 바른다.
농사짓는 것도 잘하는 것 같다.
할 줄 아는 요리가 많다.
분위기만 잘 타면 키스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팔짱보다는 손잡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연락 안 할 때 자기 생일날엔 연락이 올 때도 있다.
기아 넣을 줄도 모르는데 1종 보통면허를 소지하고 있다.
은근히 길을 많이 안다.
조미료를 안 쓴다.
채식주의자다.
하지만 가끔씩 누가 사주면 고기를 먹는다.
예민한 기간엔 알아서 잠수 타야 한다.
일찍 일어난다.
지하철 빈자리를 좋아한다.
앉으면 바로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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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가끔씩 안전벨트 매는 걸 잊어버린다.
주차하는 걸 신기해한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옷을 막 준다.
내가 입어도 딱 맞다.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람 없는 극장을 좋아한다.
잊었다고 하지만 잊지 못한다.
힘든 내색을 안 하고 얘기도 안 한다.
물어봐도 대답 안 한다.
대답하면 나는 못 알아듣는다.
설거지를 잘하면 조금 칭찬받는다.
가방지퍼를 내가 고장 냈다.
돈 달라고 하면 농담으로 들으면 안 된다.
사랑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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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알면서 안 할 수도 있다.
악기 하나쯤은 다루고 싶어 한다.
노력으로 몸치를 극복했다고 한다.
필통 공장에서도 일했다.
인사동 삼청동 같은 곳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끔씩 싱크대에서 양치한다.
오래된 노트북을 잘 쓰고 있다.
무거워서 그런지 들고 다니는 건 못 봤다.
독서를 좋아한다.
나일론 환자 배역을 잘 소화한다.
거기서도 책을 읽는다.
지금은 날 싫어한다.
가끔씩 내 생각을 한다고 말한다.
메모를 습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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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좋은 글을 좋아한다.
포도를 좋아한다.
금속 알레르기가 있다.
담뱃재를 비벼서 턴다.
사람을 좋아한다.
ENFP이다.
말도 안 되는 나뭇잎을 나에게 먹였다.
또 먹으라면 먹는다.
이상은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에너지를 얻는다.
빨리 대답 안 해주면 화낸다.
고양이를 좋아한다.
콘트라베이스 소리를 좋아한다.
돈을 아주 잘 쓴다.
자세 안 좋은 남자를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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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파마가 쉽게 풀렸다.
날 진심으로 사랑한 기간도 있었다.
나이를 점점 먹고 있다.
차로 짐 실어주면 든든하다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머리에서 좋은 향이 난다.
귀 파는 걸 무서워한다.
즉각 반응을 좋아하는 것 같다.
똑같은 일상생활에 쉽게 지쳐버린다.
재미로 점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사주 카페도 좋아하는 것 같다.
머리숱이 많다.
사진 찍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한때 디카로 사진에 취미를 가진 것도 같다.
나랑 얘기한 것을 가끔씩 녹화할 때도 있다.
내 과거를 궁금해할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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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케이크를 자를 땐 과감히 잘라야 한다.
지갑을 잊어버려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어야 이 여자를 만날 수 있다.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난폭운전을 싫어하지만 끼어들기 많이 하면 운전 잘하는 줄 안다.
생각보다 겁이 많다.
할인마트에서 바구니 두 개 받아오는 걸 좋아한다.
항상 손빨래를 한다.
바닥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잘 쓸어 모은다.
남자는 다 자기 아래라고 생각한다.
자기 힘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생활력이 강하다.
때때로 능글맞다.
목소리가 너무 이쁘다.
별명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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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은근히 질투심이 있다.
라이브 공연장에서 잘 논다.
나의 건망증을 싫어한다.
래리 칼튼의 곡을 엠피쓰리에 저장시켰다.
펑크 라이브도 즐길 줄 안다.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사랑해"라고 외칠 수 있다.
종은 친구들을 두고 있다.
내가 사준 시집은 보이질 않았다.
나에게 몇 번의 눈물을 보였다.
항상 바쁘게 산다.
그러다 제대로 늘어질 줄도 안다.
라면 먹는 것을 한 번도 못 봤다.
방부제가 들어간 삼각김밥을 못 먹게 한다.
2년 전 선물한 핸드폰 고리를 아직도 달고 있다.
비처럼 음악처럼 노래를 비 오는 차 안에서 부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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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준비성이 있다.
등산을 좋아한다.
피아노를 쳐주면 잠이 든다.
입술이 부드럽고 이쁘다.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를 아침에 불러주면 크게 감동한다.
영어 발음이 좋다.
문자메시지는 맞춤법을 정확하게 보내줘야 한다.
등산 가방을 봐 둔 것이 있다.
너무나 복잡한 내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녀와 같이 미용실을 두 번이나 간 적이 있다.
한자 이름에 획이 많다.
첫 꽃 선물은 하얀 소국이었다.
상황에 따른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때로 그것이 실수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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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수요일 저녁은 10시 이후로 통화가 가능하다.
음악에 대한 편견이 없다.
선풍기 바람을 싫어한다.
자연 바람을 좋아한다.
일할 땐 많이 예민하기 때문에 귀찮게 하면 안 된다.
섹시한 쇄골이 매력이다.
같이 본 영화는 손에 꼽는다.
지인들 앞에서의 스킨십은 꺼려한다.
연무대에서 보낸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사진이 없다고 한다.
눈이 약간 나쁘다.
나는 맡지 못하는 차 안의 찌든 담배 냄새를 맡는다.
후각이 발달했다.
줄 안 생기게 티셔츠 개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옷이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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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지름길을 알아두지만 몇 번 시행착오를 겪는다.
여러 직업의 훌륭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6년 전 직장 동료들에게 마시마로 인형을 선물 받았다.
술 먹고 토하는 모습을 못 봤다.
술에 취한 적이 있긴 한 것 같다.
04년도의 헤어스타일은 최고였다.
같이 미국 가서 살자고 하면 망설이지 말고 '그래'라고 말해야 한다.
잠깐 중요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겁이 난다고 말한다.
무거운 가방을 한쪽으로 메면 날 걱정한다.
같이 본 영화 중에 '다빈치 코드'를 제일 재밌게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눈물을 흘릴 줄 안다.
결혼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화장 안 해도 이쁜 얼굴이다.
아직 젊다.
자신감이 넘치며 긍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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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미래 자신의 건강에 불안해한다.
태어나줘서 고마운 사람이다.
강해 보이지만 연약한 사람이다.
그녀 앞에서 술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늦은 시간에 그녀 앞에서 치킨 먹는 걸 자제해야 한다.
술은 남겨도 음식은 남기면 안 된다.
손이 참 따뜻하다.
길에서 '뽀뽀'라고 말하면 가볍게 키스해주면 된다.
시디를 선물해도 들을 곳이 마땅치 한다.
짧은 두 개의 길 중 걸으면서 구경할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그녀가 마시는 물의 온도가 따로 있다.
내가 건넨 냉정한 충고가 그녀에겐 감동으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아침에 일어나도 입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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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가끔씩 변비로 고생하는 것 같다.
헤어졌으면 절대 매달리면 안 된다.
전화기를 두고 다닐 때가 있기 때문에 통화가 안돼도 초조해할 필요가 없다.
그녀에게 내가 이해 못하는 열등감이 있다.
그녀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작고 귀여운 지갑을 찾았다.
스쿼시를 할 줄 안다.
사랑받으려고 사랑하면 힘들어진다.
기다리면 그녀도 추억을 할 줄 믿는다.
가장 귀여운 표정을 나는 알고 그녀는 모른다.
달빛에 비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를 힐끔 훔쳐보다가 한번 걸렸다.
노트북에 신기한 음악이 저장되어 있다.
화가 나고 답답하면 얼굴에 써져 있다.
컴퓨터 바탕화면 정리를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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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나에게 별명을 지어준 여자는 그녀 하나뿐이다.
그 별명이 맘에 든다.
남대문 시장에서 많은 양의 목도리를 잘 깎고 잘 산다.
나에겐 그녀가 운명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운명이 아니다.
전생에 내가 그녀에게 잘못을 많이 한 것 같다.
많은 양의 아름다운 새치를 가지고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국숫집이 있다.
그녀가 좋아하는 수제비 가게가 있다.
난생처음 시사회로 영화를 보여준 사람이다.
그리고 눈 오는 날 지하철역까지 뛰어갔다.
설거지를 열심히 하면 뒤에서 안아주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만약에 날 만나고 싶다면
내가 언제나 반가운 얼굴로 만나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모른다.
밥은 제때 먹어야 한다.
공짜로 인터넷을 쓸 수 있는 곳을 많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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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힐러 The Wounded healer

일벌이길 좋아한다.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잘 파악하고 대처한다.
고맙단 말을 써줘서 고마운 사람이다.
그녀의 매력은 글이나 말로써 표현이 불가능하다.
오직 마음만이 알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그녀를 만나 사랑하고 다시 아플 것이다.
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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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나는 때때로 아버지를 향해 미운 감정을 일으키고,
엄마의 무심한 말에 쉽게 상처를 지어낸다.
금세 위축되고 쭈그러든다. 자신감이 없다.
이런 나를 잘 감싸 안고 품고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하려는 바이다.
그리고 이런 어린 아이가 나의 삶, 인간관계, 일, 사랑에
훼방 놓지 않도록 그 아이를 잘 달래고 돌봐주려 한다.
그동안이 여정은 그런 아이를 찾아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바깥에 없었고 내 안에 있었다.
마흔이 되어도 내 안의 아이는 뛰어논다.
어쩌면 그 아이는 나의 모자라고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라
상처가 아니라
나의 창조성을 도와주고 조금 더 순수하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나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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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내 안에는 무수하게 많은 내가 존재한다.
그런 나를 하나하나 다 정당화하고 옳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아이를 지켜보고 바라본다.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을 하기 위함이다.
고요히 사유하고 나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을 때 나는 안전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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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할머니
돌아보면 나의 사상과 철학이랄 수 있는 기준점들은
96세경 몸을 떠나 본래 자리로 돌아가신
할머니 김말녀 옹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다.
2005년 100일간의 행자 생활을 마치고 귀촌을 생각하며
할머니께서 계신 정읍에 약 8개월간 내려가 함께 살았었는데,
할머니의 말씀, 행동 여러 면들이 그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에서 돌아보면 혀를 내두를 것들이 많다.
가령 마당에서 뭔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채소를 삶은 물을 버리거나 할 때처럼 뜨거운 물을 버릴 때
"뜨거운 물을 버린다." 말씀을 하신다.
"누구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물으면
미물들도 다 듣는다고 알려줘야 한다고 하셨다.
냉장고, 밥통, 가스레인지와도 종종 대화를 하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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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할머니와 함께하는 것은 무엇이든 오래 망가지지 않고 쓰는 이유가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할머니의 태도 때문였음을
그때는 갸우뚱하던 것들이 지금은 이해가 간다.
가을, 볕이 좋을 때 온갖 것들을 말리는 시간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가지, 호박, 각종 나물들.. 고추, 깨 모종, 콩 모종 등등을
널고 말릴 때도 그분만의 순서와 방법이 존재한다.
무엇 하나 하더라도 '가지렁 가지렁 해야 하니라'하는 목소리.
손이 투박한 손녀는 맨날 혼나느라 바빴다.
할머니의 정해진 룰과 기준점들이 하나같이 불편해서
불만이 가득했던 나는 겨울이 되자 소복한 눈이 내리는 정읍을 떠나
태국이며 인도며 여행을 하고는 서울로 복귀했다.
'할머니는 유난스러워'하면서 말이다.
할머니 본인만의 고유한 삶의 태도들,
4시에 일어나 혼자서 매일 미사 책을 펴고 기도하시고
5시가 조금 넘으면 밥을 안치고 마당 남새밭을 돌보고
6시쯤 돌아와 아침 뉴스를 보다가 잠시 눈을 붙이셨다가
7시쯤 아침 식사를 하고, 느릿느릿 이것저것 하루종일
바듯한 스케줄을 만들어 소화하시고는
저녁 6시 즈음 집으로 돌아와 6시 내고향을 보며 쉬시다가
저녁을 차려 드시고는 연속극을 보다가 잠드는 일상.
일요일의 성당 나들이를 위해 꼭 목욕재계하시던 모습들.
매일 일과를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자족하고
어쩌다 손녀가 훼방꾼이 되면,
잠시 성질도 내시지만 이내 즐기는 여유.
할머니를 기억하면서 그 분만의 ‘편안함'을 느껴본다.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 유년을 보내며
할머니와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에 불 때던 기억,
초등학교 때 여름방학마다 내려가서
시골 집을 새로 지을 때 부엌데기로 일하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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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겨울 방학이면 서울 올라오신 할머니와
방을 함께 써야 해서 심통 부렸던 기억.
80대까지 버스로 자양동이며 중곡동이며
서초동이며 자식들 집을 대중교통으로
휘휘 다니던 할머니와 함께 버스를 탔던 순간들까지.
자립적이고 무엇이든 깔끔하게 잘하시는 성품이었던
할머니 곁에서 있을 때면 나는 나를 편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뭔가 잘하려 들면 실수가 많고 편치가 않았던 것이
이런 습관으로 연유함이려니 싶다.
2013년도 초반 제주 출장 중에 아버지의 전화를
통해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월정리에서 모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럼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저 먹먹했다.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 중 한 명인
할머니를 떠올리면 아직도 뭔가 잘하지 못하는 어린 내가 느껴져 썩 편치가 않다.
예쁨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놓아지지 않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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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위저드
금요일 저녁이었다.
출입문만 있을 뿐 사방이 벽인 직사각형의 공간에
1인용 책상 15개를 긴 디긋자로 배치하고
마음피트니스 교육을 준비했다.
올림픽공원과 잠실새내역 사이에 있는 공유공간.
회색 벽과 회색 책상, 빔프로젝터와 스크린 등
사물들이 놓여있는 것으로도 그 공간은 꽉 찼다.
마음이 갑갑했지만 그 마음을 외면했다.
숨을 불어넣지 못했던 실수는 톡방에 시간을 잘못 올려놓은 것을
알아차릴 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차... 자책하는 마음이 몸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자책이 시작되니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교육을 마치고 나서
3년 만에 연결된 후배와 만나자고
약속해둔 내가 싫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연자실.
정신이 없었다. 잠시 다른 곳에 주의를 돌렸지만 영 찜찜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후배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에 대한 너그러움이 도통 생기지 않는 순간,
다행히도 30일 프로젝트로 '자비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변화의 버튼을 누른 듯, 압력이 가득했던 뭔가가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휴~
이튿날, 아침에 목석으로 깨어났다.
다시 연습을 한다. 소생이 시작된다.
가끔 내가 벽이 될 때가 있다. 스스로 자책을 할 때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몸은 뻣뻣해지고 행동은 게을러진다.
포유류 생물이 물체가 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배추도사도 울고 갈 변신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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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과거에는 상당히 오랜 기간 변신을 했다.
겉은 사람이지만 의식은 개구리가 될 때도 있었고, 돼지가 될 때도 있었 다.
내가 의도적이지 못할 때의 자괴감이란 상당했다.
2014년 2월 미국 플로리다 데이토나 비치에서 열린
아봐타 위저드 수업을 받으면서 https://wizardcourse.com/ko/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던 내적 변신의 원인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배웠고
계속해서 훈련해나갔다. 어느덧 6년째.
위저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나이와 관계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70세 어머니는 66세에 위저드 1세가 되었으니까.
우리 가족은 그렇게 위저드로 생을 살아가고 있다.
위저드로 생장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데
각자의 생장 속도와 변화의 추이가 달랐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인격이 성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의식을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정성을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새로운 개념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자아상이 변화하는 일이다.
과거의 상처와 기억들이 무의식적으로 내 마음을 운영하려 할 때
조금더 주인된 태도와 마음으로 생각의 방향을
선택하는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삶에 새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회복과 공감 그리고 나아감을 함께 하는 여정을 걷는 여행자로
가족의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한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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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대추씨의 유래
여전히 강연을 가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왜 대추씨인가?이다.

#1 2006년 가을, 홍은동
무소유 여행자 모드가 시작되던 그때,
금강지 언니의 집에서 기거할 무렵.
감기를 떨치려 대추차를 만들던 K모씨(당시 20대).
뭉근하게 달인 대추차를 체에 걸러 대추씨가 다량 나오게 됩니다.
'이걸 어떻게 재활용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검색 포털사이트에서 '대추씨'를 검색합니다.
아마 기억하기론 11월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몇 가지 검색 결과 중
'작지만 단단한 사람을 일컬어 대추씨라 한다'는 워딩과
'대추씨는 식물의 씨앗 중 경도가 가장 높아서 망치로도 안 깨진다'는
워딩이 눈에 들어옵니다.

#2 대추씨 프로젝트의 탄생
"그렇다면 그 단단한 씨앗도 잘 돌보면 싹이 트고 나무가 되어
번영을 의미하는 대추 열매를 맺는다는 말인가"
내 안에 단단하고 못난 부분들도 살피고 가꾸는
뭔가를 해봐야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확장.
포스트잇에 '대추씨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적어 봅니다.
그때부터 일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습관들을 100일 단위로 프로젝트로 만들어 시작합니다.
'나에게 밥상 차려주기' 가 시작.
당시는 정토회 봉사 활동을 하며 아침 기도를 하던 때인데
아침 기도와 더불어 삶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개인적 프로젝트를 만들기 시작한거죠.
이후로 일정 기간씩,
모닝 페이지, 생협에서 소비하기. 매일 춤추기, 다이내믹 명상 등..
일상 실천 프로젝트가 계속되었어요.
가장 오래 한 것은 아침 108배 10년,
다이내믹 명상 6개월, 아침 산책 8개월 등등...
최근 모닝 페이지라는 책도 유행이었는데,
그 내용처럼 일상을 변화의 출발점으로 만드는 습관을 실험합니다.
명상, 수행 방법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법들을 연구해가죠.

#3 일상이 답이로구나
대추씨라는 소셜벤처의 주요 교육 콘텐츠도
이처럼 일상을 변화시키는 움직임,
마음가짐을 경험하고 공유하는데 기반하고 있죠.
명상의 다양한 방법들을 개인 프로젝트로 실천하며 연구해가던 중
명상의 상태에 주목하게 됩니다.
존재에 더 깊게 연결되고 공감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 공유하자.
단순하고 쉬운 명상 방법을 함께 경험하고
공감의 문화가 퍼져가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죠.
그렇게 혼자서 대추씨 프로젝트를 이어가다가
2010년 3월 이직 면접을 보게 됩니다.
거기서 질문에 답을 하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이거로구나 느끼게 되 죠.
기존 직장에서 퇴사해 대추씨 프로젝트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4 지속 가능함에 대하여
물론 퇴사 후 2년여간 암흑의 시기를 보냅니다.
사람들에게 내 가슴속에서 생성된
이 '느낌'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혼자서 '무브먼트'를 하다가
지속 가능함을 위하여 2012년 창업까지 이르게 되죠.
사업은 그 느낌을 더더더더더더 명확하게 해야 하는데
저는 참 표현력이 부족합니다.
여전히 손익분기는 지각도 못한 채 그저 표현을 해온 거 같아요.

#5 덕업 일치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저는 참 막무가내 '덕후'였구나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나이는 마흔을 넘기고^^;).
2016년 느닷없이 가까워진 '낯선 대학'이라는 곳에서
'덕업 일치, 월급 바깥의 세상에서 살아가기'라는 이야기를 나눠요.
참 좋더라고요.
살아온 그림을 그려보고 다시 해봐야겠다 마음먹고,
요즘 열일하고 있습니다.
11월에는 참 재밌는 워크숍이 많았어요. ^^
아침부터 대추씨를 좀 자세하게 설명해달라고
카톡을 주셔서 적어보다가 공유해봅니다.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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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크리스마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샀던 카세트 테이프.
길보드 차트라고 불리던 최신가요 테이프,
즉 불법 녹음한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는 놀이터 한 쪽에 있었다.
거기서 퍼져나오는 음악 소리는
라디오키즈였던 나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하지만 용돈이 없었던 나에게
그 테이프 한 개를 손에 넣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언제나 오빠 친구들이 구입한 테이프를 빌려 공테이프에 녹음해서
새로운 것을 다시 입혀 듣곤 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디서 돈이 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승환의 1집 카세트 테이프를 샀던 기억이 있다.
서태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의 꿈은 이승환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친구들끼리 별명으로 불렀던 것이
승환 댁, 상원처(여명의 눈동자 박상원), 동건 부인 등이었는데
서로 좋아하는 연예인의 여인이 되고 싶다는 사춘기 소녀들,
심지어 그 호칭을 사수하고자 싸움이 나기도 했다.
테이프가 늘어지기 직전까지 듣고 또 듣던 나는 중학교 2학년
경주 수학여행 때 '좋은 날'이라는 곡으로 춤 공연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2학기가 되면서 나의 키가 이승환의 키를 넘어서고,
서태지가 나타나면서 그 테이프의 중요도는 뚝 떨어졌지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첫 번째로 좋아했던 최신가요 군에 속했던
가수 이승환에 대한 애정은 아주 오래 계속되었지만
나의 관심은 서태지, 듀스, 박진영 등의 가수들로 옮겨갔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키는 170 센티를 넘었고,
교실 맨 뒤쪽에서 말이 별로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였다.
올해 초 고 2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김윤리(윤리과목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내가 기억했던 나와 전혀 다른 나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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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권반장은 나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며 진지함에 대해 이야기하셨 다.
나는 그저 나를 '조용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키도 크고 표정도 좀 덤덤하고, 한마디로 셌던 거 같다.
돌이켜보니 떠오른 기억 하나.
고등학교 때는 내가 뭔가 말을 하면 아이들이 다 내 말을 듣는 편이었 다.
그래서 원래 대화란 그런 것인가 보다 했다.
좀 놀았던 어떤 친구들이 와서 약간 시비를 걸 때도 있었는데
나는 나의 싸움에 대한 소신을 얘기했다.
"난 절대 안 때린다." 말하고 잠시 바라봤다.
그때 그냥 대화를 몇 마디 나눴다고 생각했고,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다.라고 나를 기억했다.
살면서 누구를 크게 때린 적도 없고 싸울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기억이었다.
난 이미 표정으로 기운으로 여럿 때리기도 했음을 이제는 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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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물리적 충돌만 없었을 뿐.
꽤 오랜 시간 방어기제로 써왔던 '살벌한 평화'로 인해
크리스마스엔 여러 남성들이 내적 부상을 입기도 했다.
10년간 매일 아침 108배와 명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참회할 스토리도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웃기도고 슬픈 과거사.
예수가 이 세상에 나투신 본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전생의 나를 위해 기도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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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여행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빨래를 개고,
따뜻한 모과차를 마시고 걷기 시작했다.
유원하나아파트를 지나 옥천암을 바라보며 걷다가
홍지문을 가로질러 상명대를 지나 세검정을 지나쳐 육교가 보인다.
그곳에서 좌측으로 세검정초등학교 방향 골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지중해풍 흰색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을 쭉 걸어 오르니 숨이 가쁘다.
집을 나와 약 25분간의 걸음이 생기를 전해준다.
일요일 오후의 여행,
오늘은 40대의 엄마와 중학교 1학년 딸과 함께 프라이빗 레슨 북리딩.
서로의 관점을 공유하고 삶을 탐사하는 멋진 여정이다.
첫 만남이지만 아주 낯설지 않은 여행자들,
5시가 넘어서자 그들과 헤어짐이 아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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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내면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시간은 강렬한 여행이다.
나는 오늘도 여행자로 하루를 보냈다.
지역
첫 여행지는 부산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고등학교 동창들과 청량리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 5시에 도착했던 낯선 곳.
들어본 지명이라고는 태종대, 해운대.
새벽부터 스산함을 뚫고 태종대 자갈 해변을 걸었다.
그저 머얼리 떠나고 싶었던 우리들.
마음의 힘듦을 다룰 방법이 없어 그저 멀리 떠나 정처 없이 걸었다.
자갈치 시장도 들렀고, 해운대도 갔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 버스로 이동하면서 정말 피곤했고
그날 오후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이
우리가 선택하는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다녀온 후에 일주일을 아팠다.
그럼에도
정동진, 해남 등등 극점을 향한 한반도 여행은 계속되었다.
마음을 운영할 방법을 모르니 몸이 힘들었다.

해외
한반도의 극점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2002년 월드컵 열기가 한창일 때
인도로 떠나기를 감행했던 나의 의식.
그때의 괴로움의 깊이는 인도양을 넘어섰다.
비행기에 타고 너무 무서워서 한참을 울었다.
그 당시는 스마트폰이 웬 말,
가이드북 한 권 쥐고 45리터 배낭을 메고 두려움이 100리터였다.
델리에 도착해서 인천공항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약 40일을 어떻게 여행을 하고 돌아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게 기적이었다.
한편 마흔이 된 지금까지
여행을 계속하며 살고 있는 것도 기적이다.
매해 2~3번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다닌지도
어느덧 6년째가 되었으니.

기간
짧게는 몇 시간, 며칠, 몇 달의 여정부터 꽤 장기간의 여행도 있었다.
10여 년은 매일 아침 108배와 명상,
초기경전을 읽으며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여행 했고,
어느 6년은 전국을 다니며 독일 선생님과
명상을 다양한 방법으로 트레이닝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의 기간이나 규모로 볼 때
2010년부터 시작된 창업의 여정도
상당한 배움이 있었던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운영하는 방법들을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들이 쌓이면서 몸의 괴로움이 훨씬 덜하다.
20대보다 건강하게 여행할 수 있어 다행이다.

무소유
2001년 집을 나와 1인 생활자가 되어 나름 살림살이가 많았다.
2005년 문경에서 행자 생활 여정을 하기 위해
살림의 많은 부분을 기증하거나 나누고 짐이 줄어들었다.
1차 무소유 달성.
할머니와 함께 귀촌 생활 시절 다시 살림이 불어났다.
나는 욕망이 많은 사람이었다.
도시로 돌아와 다시 살림이 늘었다. 여행만큼 이사도 많이 했다.
그 여정에서 이제 나는 정말 남길 것은 무엇이고
나에게 중요한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

마흔
어느덧 꽉 찬 사십 해를 살았다.
그 기간 동안 만든 다양한 여행의 경험들이
앞으로 어떤 여행을 할 것인지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나의 인생을 어떻게 여행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여행자들과 만남의 순간들이 환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나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흥미롭게 탐사해보려는 마음가짐.
본격적인 사십대라는 시간을 여행하기 위해
그동안 워밍업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 시간이 설레고 좋다.


흥미라는 단어를 보면 '춤추듯'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에게 춤은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그래서 춤의 세계를 여행하기도 했다.
댄스스포츠(룸바, 차차차, 왈츠 등) 탱고, 살사, 스윙 등의 소셜댄스,
1인 즉흥, 현대무용, 신성무(명상), 아프리칸 댄스
그리고 나에겐 막춤이라는 익숙한 공간도 있다.
돌아보면 롤러스케이트장에서 학교 축제, 나이트클럽, 댄스 동호회,
다양한 바와 대극장 무대까지
다양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가장 오랜 여행지이기도 했다.

음악
춤과 뗄 수 없는 여행지는 음악이다.
말이 없고 친구가 적었던 나는 초등 저학년부터 라디오키즈였다.
흘러간 가요에서 팝송까지 내 가슴속에 많은 노래가 저장되었다.
중학교 때 들은 쳇 베이커는 재즈라는
거대한 장르 여행지의 문을 열어주었고
이십 대 중반 재즈음악동호회 카페 운영진의 자리에 나를 데려다주었 다.
모든 만남은 내 삶에 어떻게 발현될지
혹은 그다음 생에 어떤 모습이 될지를 결정한다.
만남이 귀한 까닭이다.
여행이라는 한 단어에 여러 시간을 오고 간다.
내게는 힘이 강한 단어이다. 숨을 잠시 내 쉰다.
오늘의 여행은 여기까지^ ^

104
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엄마의 바다
글쓰기 친구 우연의 백사장 이야기를 들으니
지구 반대편 플로리다 데이토나 비치가 떠오른다.
차가 다니는 해변가, 모래의 입자가
손가락 사이로 떨어뜨리면 날아다닐 정도로 가늘고 하얗고 빛나던.
2014년 2월 처음 만난 대서양의 바닷가는
우리나라의 바다에서 볼 수 없는 아주 묘한 평화로움을 안겨주었다.
거대한 수평선과 파도의 규모가
무척 낯설고도 다른 행성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과 거대한 리듬의 파도와 수평선.
기억을 더듬어보면 처음으로 엄마와 함께 바다에 간 것이었다.
숙소인 리조트앤스파 호텔의 베란다에서는
매일 아침 일출을 볼 수 있었고
엄마와 나는 그곳에서 보름 간을 먹고 자고 배우며
처음으로 서로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보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천여명 사이에서
엄마와 나는 아주 낯설기도 하고 아주 친근하기도 했다.
그곳에 처음 도착한 날 엄마는 아빠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다른 이를 통해 듣고는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여권은 내게 있으니 돌아가려면 알아서 가시라고.
엄마와 나는 이제 더이상 원망의 세계에서 살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책임감으로 나는 최선을 다해 서있었지만
사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일주일간 몹시 불편한 동거를 했다.
엄마와 나의 관계로 말하자면 다섯살 무렵 헤어져서
스물셋쯤 다시 만난 사이다.
서로에 대한 애증으로 편치 않은 관계 속에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 터였다.
헤어져 산 시간의 간극이 서로가 만난 시간을
그림자처럼 뒤덮어 유쾌한 순간들을 많이 만들지 못했다.
슬픈 10여년이 내가 요가, 명상, 수행을 공부하게 한 시간이었다.
고행의 시간을 지나 밝음의 스토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2013년도 아봐타 코스를 함께하면서부터다.
우리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하나하나 걷어내는
조금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한
시간을 만들기로 용기내었다.
2013년도 8월에서 2014년도 2월 사이 우리 모녀는 그렇게
그 바다에서 만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처음 일주일은 쉽지 않았다.
8일째 되던 날, 엄마가 나를 불렀다.
"민희야 얘기 좀 하자."
함께 바닷가에 나간 우리.
모래사장에 앉아 엄마는 한참을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그 눈물에 엄마의 지난 세월과 나의 지난 세월이 흘러나왔다.
"엄마 무슨 일 있었어?"
"내가 화장실에 가다가 그 인간을 봤다."
"응?"
"니 아버지"
"......"
" 왠 할아버지가 내 눈 앞에 있더라."
다시 눈물...
삼십대 후반 서로 맞지 않은 결혼 생활 속에서 헤어짐을 선택한 후,
엄마는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그 기억 속에 박제되어 원망과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는 현재로 돌아왔다.
마치 저주의 마법이 풀린 사람처럼.
나 역시 엄마와 함께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경험했던 자유로움.
엄마와 아빠는 나와 함께 2014년 데이토나에서 열리는
Avatar Wizard Course 프로그램에 참석을 했지만
서로가 참석한다는 사실은 안내 받지 못했던 것이다.
30여년만의 짧은 만남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이 바로 각자의 미움과 원망,
회한에 사로잡힌 두 남녀가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각자 다른 호텔에서 숙박을 했고,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이들과 연습을 했다.
13일간의 코스 기간동안 말도 섞지 않았고
자신의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각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그 후 우리는 참 신기하게 편해졌다.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서로를 삶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중간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
10년간 매일 아침 108배를 하며 기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이 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목표가
'괴로움이 없는이 자유로운 이가 되어
이웃과 세상에 잘쓰인다'는 주제였는데,
미움이 괴로움이었고 슬픔이 괴로움이었다.
나는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의 노예가 되어 자유롭지 못했다.
10년 기도의 응답은 그렇게 찾아왔다.
이후 5번, 그 바다에 매년 찾아갔다.
그리고 사랑과 감사에 대하여 배워가고 있다.
참고로 난 신앙을 내세우는 종교인이 아니다.
천주교 집안에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교회를 다녔고
20대에는 불교를 공부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여러 마음공부를 하다가 결국 직업도 만들어가며,
마음피트니스라는 프로그램과 강연을 하고 있으니
신께서 나를 잘 도와주고 계심에 감사 할 뿐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일요일 저녁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해요?'
'일요일 연속극보지'
'제목이 뭔데'
'하나뿐인 당신'
'어 그럼 엄마한테는 나랑 남편이겠네'
'나한테는 니가 1번이야'
'엄마 그럼 나 기호 1번 밀어주는 겁니까?'
'그럼 끝까지 밀어주지.'
'나한테 이런 내편이 있어서 참 좋다.
엄마 오래 오래 건강하게 잘 살아봅시다.'
칠순 엄마랑 나누는 사십대 딸의 흔한 대화.
삼십년 차이 나는 우리들의 스토리는 그렇게 쓰여져 가고 있다.
사랑과 유머를 가득 싣고.

새아버지
올해 칠순이 된 이봉순씨
내가 세상에 태어나고 4년.
이후 초 3때 정읍에서 여름방학 기간 중 며칠간.
중학교 시절에는 보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로 찾아와서 잠깐.
2000년도 스물셋 일때부터 교류를 해왔지만 함께 살지 않았다.
내 삶 속에 존재한다고 강하게 믿고 있지만
그녀의 현실의 삶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거의 '모른다'가 진실에 가깝다.
내가 존재하기 이전에 삼십년의 삶 속에
그녀의 출생 유년, 소녀, 사춘기, 청년이 존재했을 것이고,
한 남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본 경험이 있고나서
'딸'이라는 존재를 만났을 터.
그녀가 나를 만난 이 후에 겪었던
어려움과 힘듦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이후 나 역시 그 그림자의 영향에 있었던 6년여의 시간.
이후 도서관은 내게 그림자 바깥의
다른 여러 그림자 속으로 여행하는 시간이었다.
그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있고 나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관성처럼 마치 책을 읽듯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내가 생각해 놓은 책에 그녀의 삶을 가져오기 십상이었다.
온전한 이해란 무엇인가.
그녀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모르던 이야기들이 결합될 때 온전해 짐을 느낀다.
올해 여름 다리를 다쳐 입원한 엄마의 수술 대기실에서
엄마와 20년을 넘게 한 집에서 산 새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의 삶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재혼을 결심했던 이유.
재혼 이후의 삶. 그속에서 반복되는 패턴.
어떤 특정한 습관이나 감정적 반응이 반복 될 때 삶의 무늬가 된다.
그리고 그 무늬를 통해서 그 사람의 독특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의 삶에서 엄마를 이해하려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느끼는 어려움을 살펴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해 적어볼 것을 생각하게 된다.
2018년 가을

115
힐드 힐러 The Healed healer

눈치
눈치의 대척점에는 무감각이 있다.
눈치가 발달했을 경우 무감각에 대한 이해도 깊어져야 하는데
균형이 맞지 않는 부분들을 삶에서 종종 만난다 있다.
어떤 주제는 눈치와 무감각을 지각하는 기능이
둘 다 발달해 있어서 가볍고 유쾌하다.
어떤 주제는 눈치와 무감각이 별도로 존재해서
뭔가 눈치를 보기는 하는데 어떤 면이 무감각해져서 무게가 느껴진다.
'눈치 보는 사람' '눈치 주는 사람' 모두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 저항의 방식이 무감각으로 드러난다.
어릴 때 눈치를 많이 봤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오빠의 눈치를 봐야했고,
밀린 월세로 집주인의 눈치를 봐야했다.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을 때는 할머니 눈치,
아버지가 술에 취한 날이면 새엄마와 주변 눈치를 봐야했다.
남의 마음을 그 상황에 미루어 알아야 했고,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눈치도 많이 받았다.
회사 생활도 과하게 눈치를 살피다가 쉽게 소진되었다.
눈치를 주고 받는 게 싫어서 무감각을 선택한 것이 언제부터일까.
공감이 잘 안되었던 원인이 눈치를 살피고
주고 받는 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았다.
누구보다 책을 사랑했고, 예술을 즐기고, 춤을 추었는데,
이토록 공감이 안되었던 것은 바로 눈치 때문이었다.
습관처럼 주변 눈치를 보고, 조금이라도 눈치를 주면 취약해진다.
자기 공감을 가로막는 바리케이트처럼 눈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눈치가 눈치챘을까봐도 불안했다. 눈치와의 전쟁 수준이다.
의열단 김원봉 선생처럼 폭탄이라도 던져
폭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다.
한겹 한겹 잠자리 날개처럼
혹은 솜이불처럼 쌓여 있는 그림자를 걷어나갈 수 밖에.
눈치로 먹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생존이 막막해진 느낌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처음 만난 이에게 눈치를 보지 않는
빈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게 얼마 안되는 것 같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은 감각을 느낄 수 있고
있는 그대로 그 존재와 연결되는 일이었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게 시작되니까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눈치를 주는 패턴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꼰대에 갑질하는 면이 있구나 싶었다.
꼰대 혹은 갑들은 무감각한 사람들이다.
감각이 살아난다는 것은 건강을 의미한다.
마흔의 첫 해가 저물어 가는 마당에
40대의 건강을 위해서 눈치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며
강연 때 살짝 이야기 나눠볼 수도 있겠구나.
우리 눈치랑 그만 헤어지자고.
2019년 목표는 '눈치로부터 자유' 이제 눈치 보기는 그만!
눈치 주지도 말고. 그저 사랑하고 행복하기로 결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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